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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김국광
  • 구분 역사적 인물
  • 소재지 계룡시
  • 문의처 042-840-2404

소개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광산

호 : 서석

별칭 : 자 관경, 시호 정정 · 광산군 · 광산부원군

 

김국광의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이라 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그 부친은 감찰을 지낸 바 있는 김철산(金鐵山)이다.
“여보! 지난번 꿈에 봉황 한 마리가 문쪽에서 날아와 내품에 안겼다오.”
“그래요, 그것은 태몽 꿈이구려, 큰 인물이 날게 틀림 없오. 여보.”
감찰공 칠산과 안동김씨 부부가 기뻐하는 말이다.
그 이듬해 부부 사이에서 옥동자를 낳았으니, 바로 이 아기가 김국광이었다 한다.
김국광은 날때부터 외모가 반듯하였고 자라면서 총명함이 더해 항상 아버지 감찰공은 “이 아이는 보통아이가 아니요, 훌륭하게 될 것이 틀림없으니 잘 키우도록 하시요.”하고 부인에게 늘 당부하였다.
김국광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천자문을 읽고 외웠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아이들과 놀러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성품은 온순하며 어른들께 공손하고 경솔하지 않았으며,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
말이나 행동이 예의 범절에 어긋나지 않아 어른들은, “김도령은 성인군자의 인품이었다.”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학문을 닦을 때도 대의를 쫓아 익혔으며 학문이 차차 무르익어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는 영상인 익성공 황희(黃喜) 정승이 지나다가 우연히 공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큰 그릇이로다. 이마에 기운이 차고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인물이구나.”하고 눈여겨 두었다.
1441년(세종 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교리에 올랐다. 그 때, 조모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었는데 그 조모는 바로 김씨를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한 허씨부인이었다.
허씨부인은 젊어서 과부가 되었어도 재혼하지 않고 수많은 고생속에서도 유복자를 길러 공과 같은 대기의 손자를 낳게 하였으니, 그 정성을 자손들이 어찌 다 알랴마는 공은 조모의 은덕을 깊이 깨달아 애통함이 부모보다 더하였다.
이 때에 세조가 왕위에 올라 공의 인물됨을 듣고 찾으니, 조모의 복중에 있는지라 그 효행에 감탄하여 특별히 벼슬을 높여 사헌부사평에 오르게 하였다.
1460년(세조 6년) 북쪽 오랑캐 「낭패아한(浪悖兒罕」의 변을 맞아 조정이 불안할 때 세조가 공을 불러 이르기를 “공은 이번에 함경도 지방에 가서 오랑캐의 변을 조사하고 공의 지혜와 능력으로 오랑캐를 무찌르라.”하며 함경도 경차관으로 임명하였다.
국광이 왕께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부족하여 분부하신 일을 감당할지 우려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고 죽음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했으니 힘껏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만수무강 하옵소서.“하고 물러나 집에 이으러 부인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내가 성은을 입어 오랑캐를 무마시키러 북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그 동안 부모님 잘 모시고 아이들을 잘 양육시켜 주길 바라오.”하고 떠났다.
김국광은 급히 함경도롤 달려가 오랑캐를 만나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예로부터 변방의 너희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조정의 보살핌으로 식량과 약품, 의류 등을 구하게 되었고, 또 너희들은 그 공으로 우리 조정에 우의와 신의를 지켜왔는데, 어찌하여 세력이 지금 강해졌다하여 무례하게 침입하여 강탈하기를 일삼는가? 공연히 분쟁을 일으켜 일시 너희에게 유리할 지 몰라도 결국은 우리 조정의 손에 묶일 것이니 요구할 것이 있으며, 사신을 보내 조정에 요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오랑캐는 잠시의 잘못을 뉘우치고 물러갔다.
그 공이 큰지라 세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공을 높여 이르기를 “이번 오랑캐의 침입을 돌려 스스로 물러가게 했으니 그 공을 높이 칭찬하는 바이다.” 하고 병조참판(세조7년)으로 승진하고 군정을 맡아 임무를 잘 처리하여 세조로부터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고 치서까지 하사 받았다.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세조가 크게 근심하니 공이 세조를 비밀히 찾아 뵙고 아뢰기를, “전하의 성은이 한양을 비롯하여 지방 곳곳에 미치고 군에까지 이르고 있사온데 무엇을 고심하시옵니까? 남이장군 등을 보내어 난을 평정하게 하소서.”하니 세조가 공을 미덥게 생각하던 때인지라 안심하고 함께 평정의 길에 나섰다.
이시애는 한때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고 북방민의 벼슬억제를 풀어주겠다고 앞세워 득세하였으나 남이장군의 세찬 칼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공로로 공은 적개공신 이등에 좌찬성이 되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김국광은 또한 세조의 지극한 사랑과 신임을 받아 최항, 한계희, 노사신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도 공이 컸었는데 세조때 완성하지 못하고 성종때 완성을 보았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뒤 우의정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좌리공신 일등에 광산부원군으로 봉해지는 등 명예와 벼슬이 극에 달하니 그 인품과 학문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성종 2년에 사은사를 명나라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성종 12년 11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임금께서는 “학계의 우두머리요, 조정의 충신이 돌아가셨으니 예를 갖추어 장례를 엄숙히 모시도록 하여라.”라는 어명을 내리시고 후하게 장사 비용까지 내리셨다.
후에, 시호를 정정(丁靖)이라 하였고 문집으로는 서석실기(瑞石實記)가 전한다.


한문명칭 金國光 , 1415~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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