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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김현
  • 구분 역사적 인물
  • 소재지 계룡시
  • 문의처 042-840-2404

소개

(1574 ~ ) 조선말기의 정치가, 문신

본관 : 광산

호 : 화양당(華陽堂)

별칭 : 자 지언

활동분야 : 정치, 사상 

 

왕대 2구 재실마을은 조선초기 좌의정 김국광선생의 5대손이요,
사계 김장생선생의 총애를 받던 정선공 현(顯), 자는 지언(止彦)이요, 그 호는 화양당(華陽堂)으로 광산인(光山人)이다.
5대조 휘 국광은 좌의정으로 부원군을 봉하고 고조의 휘 극괴(克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증조 휘 형윤은 평시서령인데 그의 장자 비는 부원군, 차자인 포는 자의공이었다.
자의공이 아들이 없자 부원군공의 차차 정휘(正輝) 검정공으로 하여금 손을 잇게 하니 이분이 바로 화양당의 아버님이다.
한편 선생의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선조 7년(1574) 갑술년 11월 16일에 연산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9세 때 사계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50여년간을 이웃에 살면서 학과 예를 닦았는데 사계 선생이 제자를 보고 옹(翁)이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총애하셨다.
임자년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여 장예원 별시, 사재, 군자감 주부, 형조좌랑,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나아가 정선군수, 원주진관병마검 절제사를 지냈다.
정유재란에 사계선생이 80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호소사가 되어 나라를 구할 때 선생이 일선에 나서서 충직하게 종사, 스승을 보필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사계선생께서 선생의 충근함을 칭찬하여 나라에 천거, 군기부정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선생의 나이 80세에 이르러 통정대부에 오르고 현종 2년(1661)에 천수를 다하였다.
그때 선생의 나이는 항년 팔십세요, 장지는 현존하는 왕대2구 반촌마을(청룡 간좌)에 안장되었으며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330여년전의 일로 추정된다.
그 묘앞에는 선생의 외손자 최규암 영의정(숙종, 경종, 영조)이 지은 묘갈명(1667년)이 있고 또 장군석과 충남대학교 조종업박사가 지은 신비문 등 석물들이 현존하고 있다.
선생은 기일을 맞을 때면 아무리 추운 날에도 목욕을 하고 초종때와 같이 슬퍼하며, 심한 병환이 아니면 다른 사람을 대신하지 않았다.
또 맏형과 둘째 형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호란 때에는 두집 조카를 양팔에 끼고 피난하여 구원, 양육, 결혼까지 시키고 없는 이를 도움에 아까워하지 않으니 보는 사람마다 감동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나이 팔십이 되어서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러한 선생의 덕행탓으로 스승 사계마저 제자를 가리켜 정선옹이라 높여 대우했으며, 사계선생의 아들 신독재 역시 선생을 보고 오향고사(고장의 높은 선비)라 하였다.
지금의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는 휴정서원이라 하여 연산지역에서 후세인들의 모범이 되는 선비 8명을 모시고 그 덕을 추모하여,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0년)에 이 고장 선비들이 발의하여 창진하였다.
물론 선생도 이곳에 모셔진 인사 중 한분이다.
서원 배향문을 살펴보면 선생을 보고 “유학에 박학하면서 몸소 행함을 힘쓴 학문이였다.”하고 적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선생의 진취적 기상과 공리공담이 아니요, 진실한 학문관을 가진 참된 도덕군자임을 대변한다 해도 관언이 아니다.
똑 특기할 사항으로 선생은 일찍이 큰 뜻을 가진 교육가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연산 천호산 기슭에 초시합격자와 한자의 문리해통자만이 입학할 수 있는 정회당이라는 고등기관이 있었다(정회당에는 전국 각지의 유능한 선비들이 모여들어 지방유학의 집산지역할을 하였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득이 현 대둔산 입구(논산군 벌곡면 수락리)로 이전 한 바 있다.
지금 그곳에는 정회당의 옛터만 남아 있다.
이 때엔 화양당(정선공)께서 이 고등교육기관의 총책인 당의(현교육 제도에 비하면 대학의 총장)직을 지냈음이 정회당지에 적혀 있다.
당지를 보면 본 정회당 출신이 많은 인사들이 조정에 나아가 요직을 거쳐 중추적 활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헌에 입각하여 유추해 보건대 앞에서 언급한 선생의 업적 중 「벼슬을 끝내 사양하고 후배들을 권학해서 사도(斯道)를 일으켰다」는 말이 증명된다.
정회당 옛터 내지는 정회당의 실체에 대해서 향토원로작가가 유동삼시 조시인은 그의 시집에 정식으로 소개하면서 「지역문화창달을 위하여 본 정회당에 관해 더욱 깊은 연구와 선양이 필요하다」고 당시의 정회당 정신을 아쉬워 했다.


한문명칭 金 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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