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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시로고계룡시

우리동네 명소

금암동 우리동네 명소

천마산

동쪽으로는 계룡시 금암 신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서남쪽으로는 백제 계백장군의 충혼이 어린 황산벌이 멀리 바라다보인다. 또한, 서편 기슭으로는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천마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조망이 좋다.

지역 문화재

이심원 충신정려현판

조선 초기의 충신인 이심원의 정려현판이다.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성종 때 임사홍이 국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 성종에게 아뢰어 파직시켜 멀리 유배시켰다.

연산군 때 다시 집권한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일으키자 이심원과 그의 가족들은 처참한 화를 당하였다가 중종 즉위 후 복원되었다.

정려문은 정면2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정려 내부에 명정 현판이외에 중수기, 정려기 등 4기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명정현판은 2칸으로 나뉘어 2기가 있다.

원래는 엄사리에 있었으나 198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해 이곳으로 옮겼다.

염선재

금암동 45번지 염선재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부인인 순천 김씨 정부인의 제각이다.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칠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사계선생이 1631년 타계 후 부군의 3년상을 마치고 1634년(향년 62세)에 부군의 뒤를 따르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효와 열이 근본이 되었다.

광무 10년(1906년) 정부인 순천 김씨라는 칙명의 교지를 받았다.

염선재는 원래 작은 제각이었으나 1913년에 현재의 건물로 증축되어 조선말 전통가옥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지역 자랑거리

금암동 노제

금암동 광수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마을 입구의 노목 앞에서 거리제를 행함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퐁농을 기원한다.

관제의 선출은 제일과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으로 선출하는데 제관, 축관, 유사 각 2명씩 6명을 뽑는다. 이들은 거리제를 지내기 위해 금기를 행하며 마을의 공동 우물을 깨끗하게 품는다.

거리제에 올려지는 제물은 준비함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제물의 구입과 함께 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호당 거출된 금액으로 충당한다.

거리제는 초사흘 저녁 8시경에 시작하는데 마을의 공동 우물에 "샘고사"를 지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샘고사는 풍물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물로부터 전해지는 질병이 없기를 기원한다.

샘고사가 끝나면 제관과 마을 주민은 곧바로 제장인 마을 입구의 노목 앞으로 행진한다. 이 때 풍물은 제를 치르는 일행을 선도하며 거리제의 시작을 알린다. 제장에 도착하면 풍물은 더운 흥을 돋우고 제관은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물진설-분향-헌작-독축-소지의 순으로 하는 바 소지는 호당 소지를 여럿이 나누어 동시에 올린다.

제가 끝나면 다시 풍물이 울리고 제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을회관에서는 거리제를 올린 제물로 음복하면서 한 해의 마을 일에 대한 동계를 한다.

요컨대, 금암동의 거리제는 "샘고사"와 복합되어 마을의 질병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며 아울러 한 해 농사의 풍농을 비는 제이다.

금암동 주계군 정려 이미지
금암동 주계군 정려

금암동에 있는 주계군 정려는 정면 2간, 측면 1간의 규모이며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하여 1단을 구축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의 주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으며 하방과 중방을 시설하였다. 가구양식은 도리식을 이용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측면의 박공널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여 정려를 보호하고 있다.

정려의 내부에는 명정 현판과 함께 중수기가 있다.

배영진 공적비 이미지
배영진 공적비

금암동 산 31-7에 공적비가 있다.

백봉 배영진 선생은 1864년 8월 26일 경북 안동군 예안면 등현리에서 출생, 1912년 안동에서 유인식, 이강호 등과 만주로 망명 동삼성에서 한족회를 조직 지방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였고 그곳에서 황무지 개척과 1914년 만주 영충현에서 황의영과 영춘학교를 설립하고 마려구에서 4년제 협창학교를 창립하여 인근 청년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1919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군중을 동원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신병으로 이국땅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84년 논산군수가 공적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백봉선생 행록 및 공적비문 참조)